우리가 읽고 쓰는 동안에
「전쟁과 테러」의 화자는 전시를 본다. 관람객으로 북적거리는 전시장에서 화자는 동선을 따라가며 사진을 본다. 화자가 주목한 것은 도움이 절박해 보이는,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의 사진 두 점이다. 두 사진에 대한 기술과 인용으로 미루어 볼 때 그가 보고 온 전시는 퓰리처상 사진전인 듯하다. 이 전시의 사진들이 언어와 다른 가능성으로 세상에 진실을 알리는 데 기여했다고 한다면, 그 프레임 안에 담긴 것은 기록할 만한 한순간의 포착이며 그 순간은 얼마간 극적인 제스처를 포함하고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화자가 묘사하고 있는 두 사진 역시 극적이다. 극적인, 곧 이야기할 만한, 즉 소비될 만한 그 순간은 폭력의 극점에서 셔터를 누른 손에 의해 한 장의 이미지로 맺힌다. 바로 그 손은 도움을 건네는 데 우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도 윤리에 관한 쟁점이 되어왔다.
대중적으로 많이 노출된 두 사진을 선택한 것에서부터 화자가 윤리적인 문제를 염두에 둔 듯 하지만, 그것에 대한 판단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이 시의 초점도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화자의 마음이 투영된 것처럼 보이는 “안아주지 못해서 너무나 너무나 미안했다”는 콘도르 앞에 웅크리고 있는 아이를 두고 사진을 찍은 케빈 카터가 남겼다는 말의 인용이고, 이는 실제 전시에서 사진을 보충 설명하는 캡션에 제목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화자의 감정을 대리하는 텍스트로서의 인용이 아니라, 화자가 본 것을 그대로 옮긴 묘사인 셈이다. (화자가 따라 읽은 긴급한 요청1 역시 사진에 제목으로 부여된 것이다.) 케빈 카터가 동료에게 호소했다고 전해지는 미안했다는 말은 전시가 연출하는 서사에 충실히 기능한다.2 이어지는 사와다 교이치의 비장한 전언도 마찬가지. “내일 전선으로 돌아갑니다 저는 아직 죽을 준비가 돼 있지 않아요” 이 전시에서 화자가 본 말들은 진실을 위해 투신한 영웅적 사진가 이야기의 대사처럼 들린다.
케빈 카터가 촬영한 한 장의 사진을 두고 격화하는 윤리적 논쟁은 ‘셔터를 먼저 누른 케빈 카터’와 ‘아이를 먼저 구했어야 하는 케빈 카터’ 사이를 오가고, 아이가 볼 수 있었던 세계는 배제된다. 아이는 그 순간을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낮게 엎드린 백인 남자가 자신을 향해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고. 아이가 몸으로 견디고 있었을 시간을 감히 상상해보자면, 그 사진의 사회적 파장력에 대해 쉽게 상찬하듯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아이가 뷰파인더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해제를 기다리는 피사체가 되고 이외의 삶(의 가능성)은 탈각된 채 전시된다. 전시를 보고 나온 관람객은 포토 존에서 “차례차례” 스스로 피사체의 자리에 들어가고 화자는 그 광경을 본다.
「전쟁과 테러」에서 화자가 어떤 입장을 표명하기보다 보이는 것을 연속선상에 기술하는 방식을 통해 확인되는 것은 프레임의 연쇄다. 이 연쇄를 나열해보면, 객관적 사실이 극적인 사건(이자 순간)으로서 카메라에 담기고, 이것은 다시 물리적 사진으로 인화되고, 그 사진과 사진가는 전시물이 되고, 전시의 관람객은 관람의 순간을 기념사진으로 남긴다. 전시의 소비자였던 관람객이 스스로 프레임 안으로 들어가면서 이 시에 등장한 모든 것은 전시된다. 기념사진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해시태그를 달고 전시될 것이다. (그 이미지는 최초의 긴급한 목소리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전시되기’의 연쇄, 그것이 마지막 행 “마음껏 전시한다”가 겨냥하고 있는 지점이라고 말해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전시되는 전시에서 말까지도 포토저널리즘 사진전의 모순된 드라마 연출에 복무하는 대사로 소비되고 있다는 점은 언어를 다루는 시인이 봉착한 괴로움이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그래서일까. 화자가 목도한 풍경이 다소 관조적으로 그려지는 것은 언어의 기능 상실3, 곧 진정성의 상실에서 비롯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미안합니다
어깨를 치고 간 사람이 순식간에 멀어진다 뭐라고 미처 답하기도 전에
아스팔트 위에서 흔적도 없이 말라가는 비
거짓말처럼 오는 빛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귓가에 맺혀 혼자 중얼거리는,
(「흙먼지」 부분)
「흙먼지」의 화자는 길에서 누군가와 부딪힌다. 누군지 알 수도 없을 만큼 순식간에 지나간 사람은 미안하다는 말을 남긴다. “미안합니다” 그 말이 화자의 귓가에 맴돈다. 그가 앞서 본 다큐멘터리 때문일 것이다. 다큐멘터리에서 잘못 발사된 탄환에 부모를 잃은 여자가 “미안하다고 말하면 뭐가 달라지나요?”라고 말한다. “쌓여있는 약봉지”는 그날의 일이 여자에게서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리고 여자의 부모를 죽인 것으로 짐작되는 한 남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말한다. 두 상황에서의 미안하다는 말의 진심은 저울질 되지 않는다. 그것은 저울질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런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죽은 이는 돌아오지 않는다. 어깨에 퍼져간 통증이 없던 것이 되지 않는다.
「전쟁과 테러」의 화자가 그 순간에서 어떤 진실도 구해내지 못한 사진을 봤다면, 「흙먼지」의 화자는 그 순간을 직접 경험한다. 스스로를 향해 있던 케빈 카터의 말처럼, 화자의 어깨를 치고 간 사람의 “미안합니다”는 상황을 살피지도 않은 채 오로지 자신에게 있어서 없었던 일로 무마하기 위한 혼잣말과 다름없다. 결국 실속 없는 기호만 허공에 떠돈다. 여기서도 언어는 소통에 이르지 못했다는 점에서 관습적인 체계를 확인하는 것 이상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언어에 기대하는 진정성은 현실에 닿지 못하고, 현실을 뛰어넘지 못해서 의심받는다. 「전쟁과 테러」와 「흙먼지」, 두 시의 세계에서 언어는 무기력하다. 문학에 쥐어진 책무 중 하나는 이런 공허에서 언어를 살려내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어쩌면 「흙먼지」 속 변용된 한강의 시구4에서 한 가지 방법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5월 광장 어머니회’의 이야기일 이 부분은 1977년 아르헨티나에서 군사정권에 의해 자식을 잃은 어머니들이 광장에 모여 시작한 집회를 묘사한다. 어머니들은 흰 머릿수건을 두르고 천천히 원을 그리며 침묵시위를 이어왔다. 말 대신 몸으로 시간을 채워내는 것을 한강은 보고 썼다. 말하지 않는 것 역시 언어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녀들이 무언가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음성에 실리는 말이 아니라 몸에 기입되는 말일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곤궁한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을, 그리고 분노를 최대한으로 발화한 것은 아닐까.
「흙먼지」의 화자는 언어가 진정성을 의심받는 순간에 보던 다큐멘터리를 멈추고, 한강의 시5를 읽는다. 묵음을 선택한 언어가 한강에 의해 옮겨지고 다시 화자에 의해 변용되어 독자에게 닿는다. 역사적 사실을 알지 못한다고 해도 여자들의 느린 행진은 국가의 폭력과 무능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과 남겨진 가족에 대한 공동의 기억과 접촉한다. 이를 보고 이 시를 지은 정다연 시인이 문학의 가능성에 대해 은연중 역설하고 있다고 끝맺는다면 그건 지나친 비약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믿고 싶다. 문학이 “언어, 즉 구문과 어휘의 절단, 오용, 전복, 왜곡, 불복, 비방, 편중, 불법 입국”6을 통해 모든 것이 납작하게 맺히는 디스플레이로부터 언어의 진정성을 구해낼 거라 믿고 싶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문장에 ‘우리’의 자리를 만들어 두며 함께 읽고 또 쓰는 이유이기 때문에.